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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46. <부정공>학생공휘연기효행포양문(學生公諱淵基孝行褒揚文)
1. 문헌 목록 〉22. 22世 〉48. <부정공>강운공휘연묵가장(崗雲公諱淵黙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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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부정공>정운공휘연남가장(井雲公諱淵南家狀)
井雲公諱淵南家狀 惟我玉川趙氏始顯於松京中葉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忠勲義蹟焜耀一世爲我東之著姓深遠先德詳載於祖考狀文中玆不歷序高祖諱河祥號清齋隱德不仕曾祖諱永振通政大夫祖諱東根有學行考諱炳鉉孝友備摯妣德水張氏世權其考也勤愼慈祥有古女士行矣府君諱淵南字星五號井雲 高宗丙午九月二十二日生于龜山里第性仁質厚身長容重言笑動止合於規矩殆若成人也凡四昆季序居長友愛隆贄食於斯寝於斯衣相傳學同案共期遠大矣稍長就學于從叔龜邨先生先生眷愛益重身敎言敎各盡其道府君所受是極藝業日進先生益加激勵曰不墜家聲亶在乎汝輩之誠勤讀書也府君庸作終身服膺之規箴也府君膺是相好先祖之積蔭秀氣而有弟三人怡怡益恭迭唱埍箎敬誦斯干詩和氣藹然信乎積蔭之至發於府君也謹守殖宗財之先規廣置祭田賁飾墓儀增築齋宮編修譜牒與從叔小軒族叔嵋川族兄崗雲二三諸賢周密經畫終始賢勞丕啓承先裕後之遠圖鄉黨咸稱吾家之四傑也清苦資生家道漸索府君憂悶上下衣食及吉凶之資必若未備朝出而耕樵暮歸而誦讀不闕志體之養長其識見之明竟作博學篤孝今世之古人也際玆彝倫日喪俗尚日渝人心不古也王考悶歎全眷保育之窘艱奮作鉄石之心盟歷噄異域六七星霜之辛苦庶獲有成而還鄉矣府君恐墜百艱昇天之成立基業夙夜勉俾免傷哉之歎鄉隣稱頌王考之先困後亨自求多福也戊戌十二月十六日奄遭母喪哀毀踰禮行素三年日上于墓不以寒暑或廢後三年辛丑七月十七日見背慈父哀號頓絶衣衾棺槨稱情無憾虞卒祥禫遵禮盡制一如前喪每値夫日器皿粢盛必親檢而務令豐潔哀痛如袒括時克致著存之誠也本里龜山雖曰名庄實爲農村也一面則水原短渴天若小旱全被酷災故府君常切憂悶築堤坊養水源均通水利協謀于衆無奈事巨力綿但作空中樓閣矣幸賴官之有少助府君率先醵出巨額金於耕農家是亦難事也朝朝夕夕不避雨雪家家曉喻經二歲而成一池名稱金谷池也水源壯流派長乾庄反爲濕沃相忘旱憂同樂歲豊曰是誰之力也井雲趙公永世不忘之德也將營立石而頌德豈不爲盛矣哉鄒聖曰是乃仁術政謂此也常以父母俱存兄弟無故爲天下一樂之十分至道其於富貴貧賤榮辱毀譽置之度外未暇及論時與族戚友朋情契之深厚者酣觴賦詩暢叙幽情資送餘年矣乙巳春三月偶爲損攝百方禱藥漸得復膳秋七月痛患添重往療于順天醫院少不奏効氣息漸爲奄奄擧家焦悶十四日輿還矣翌朝倚枕喟然曰今爲是月之望日也先考忌辰隔兩日而在也無奈於天定將爲逝焉不孝莫大也又命不肖曰汝之父子未能成立及笄女兒未克了債萬切遺憾命也奈何安養汝母勗率妻孥產業則體念覆墜之易如燎毛之古訓勤儉做成逝將瞑目也奄忽易簀十五日巳時也享年六十痛恨曷極遠近痛惜德厚人死也執紼誄奠者甚衆矣墓住巖面鼓岩洞奉事公塋白虎峰下麓丑坐原配慶州鄭基聖女老松亭知年后丁未七月三十日生幽閑貞淑孝舅姑順君子敬尊長愛卑幼娣姒之間無圓盖方底之患無遜配德系子休徹即不肖三女靑松沈仁求江陵劉英哲草溪崔六模孫男成容慈容餘幼嗚呼府君眞實敦厚之君子人也溫良慈愛禀質之美也勤儉清愼正家之本也冠婚遵禮喪祭盡誠正原始愼報本也交友以信敎子必篤修身之要也建齋竪碑編譜置田追遠之誠篤也敦叙天倫丕化鄉俗養水源樂歲豊家頌深廣之德豈不韙然哉嗚呼以若德行未致顯達一布衣而止是亦命也歟昊天罔極也庶或可免不知不明之罪敢述過庭見聞之萬一伏惟秉筆君子徵信而發揮之至泣血祈懇 男 休徹 謹狀 정운공휘연남가장(井雲公諱淵南家狀) 우리 조씨는 고려 중엽에 비로소 나타나 검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璋)의 충훈 의적이 일세에 환히 빛나 우리 동방의 이름있는 성씨가 되었다. 깊고 먼 선덕은 조고 장문중에 자상히 실었으므로 이에 거듭 실지 않는다. 고조 휘 하상(河祥)의 호는 청재로 덕을 숨기고 벼슬을 아니 하였으며, 증조 휘 영진(永振)은 통정대부요, 조 휘 동근(東根)은 학행이 있었으며, 고 휘 병현(炳鉉)은 효우 독실하였다. 비는 덕수 장씨(德水張氏) 세권(世權)의 따님으로 근신자상(勤愼慈祥)하여 옛적 여사의 행실이 있었다. 부군의 휘는 연남(淵南)이요, 자는 성오(星五)며, 호는 정운인데 고종(高宗) 병오년(一九○六) 九월 二十二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어질고 체질이 강하며, 키가 크고 얼굴이 옥 같으며, 말과 동작이 법도에 맞으니 자못 대장부 다왔다. 四형제의 장형으로 우애가 두터워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옷을 서로 전하고 책상을 같이 하여 원대한 기망을 가지더니 조금 장성함에 종숙 귀촌 선생에게 취학하였다. 선생의 권애가 후중하여 몸과 말로 각각 그 도를 다하여 가르치니 이에 부군이 받은 바가 극진하여 날로 진취하니 선생이 더욱 격려 하시되, 「세덕을 이어가는 것은 너의 무리가 부지런히 공부함에 달려 있다.」 하였다. 부군은 종신토록 이를 규감으로 삼았다. 부군이 상호 선조의 쌓은 음덕에 응하여 빼어난 기질로 아우 세 사람과 더불어 즐거워하는 모양이 더욱 공손하고 서로 흙장고와 피리를 불며 공경하여 斯干詩를 외며 화기 애애하니 쌓은 음덕이 부군에 이르러 발양된 것을 믿겠도다. 삼가 종채를 식리한 선규를 지켜 널리 제전을 설치하고 묘도에 석물을 크게 꾸미며 재실을 증축하고 보첩을 편수하는 등 종숙 소헌, 족숙 미천, 족형 강운 이삼 제현과 더불어 치밀하게 계획하고 종시 수고하여 선업을 이어 후손을 복되게 할 계획을 크게 개발하니 향당이 모두 우리집의 四걸이라고 칭송하였다. 가세가 청한함으로 아침에 나가서 밭갈고 나무하며 저물게 돌아와 외고 읽고 지체의 봉양을 궐하지 아니하며 그 식견의 밝음을 길러 마침내 널리 배우고 독실히 효도하였으니 이 세상의 옛 사람이었다. 그때에 천륜이 날로 상하고 풍속이 날로 더러워 인심이 예전같지 않으니 왕고께서 생활이 군색함을 탄식함으로, 철석같은 마음을 세워 六〜七년을 이역에 나가 고생하여 거의 성공하고 돌아와서도 나태로서 재물이 축날것을 두려워하여 더욱더 근면하니 이웃이 왕고의 선곤 후태를 칭송하였다. 무술년(戊戌年) 十二월 十六日에 문득 모친상을 당하여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하고 三년을 소식하며 날마다 성묘하였다. 三년 후 신축년(辛丑年) 七월 十七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호 돈절하고 의금 관곽을 정예에 어긋나지 않게 하며 우제·졸곡·소·대상 담제를 예제에 따라 정성을 다하였다. 매양 제일을 당하면 제기와 제수를 친히 검사하여 깨끗이 하고 초상 때 같이 애통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귀산이 명촌이나 실은 농촌인데 수원이 짧고 모자라 만일 조금만 가물면 전부 혹독한 재앙을 입는고로 부군이 항상 근심하여 언덕을 쌓아 수원을 만들어 고루 수리를 보급하려고 여러 사람과 의논하였으나 일은 크고 힘은 적어 생각을 태우더니 다행히 관의 보조가 있음으로 부군이 솔선하여 거액을 대고 조석으로 풍설을 무릅쓰고 집집마다 효유하여 二년만에 한 못을 이루니 이름하여 금곡지라 하였다. 수원이 크고 흐름이 길어 건답이 수답이 되어 해마다 풍년이 드니 이것이 누구의 힘인고 정운공의 덕이로다. 장차 돌을 세워 덕을 기리고자 하니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맹자」께서 이것이 인술이라 한 것이 정히 이것을 이름이다. 항상 부모가 함께 생존하시고 형제가 무고함으로써 즐거움을 삼고 부귀, 빈천, 영욕을 도외시하며 때로 족척과 붕우와 더불어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어 그윽한 정을 펴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을사년(乙巳年) 봄에 우연히 병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쓰고 빌어도 차도가 없어 순천 의원에 입원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이 기식이 점점 끊어지려고 하니 온 집안이 초민하여 가마로 돌아왔더니 다음날 아침 베개에 누워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이제 七월 망일이라. 선고 휘일이 이틀이 남아 있는데 명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 어쩔 수 없지만 못보고 죽어 불효 막심하다.」하고 또 불초에게 명하되 「너의 부자가 능히 성립하지 못하고 과혼할 여아를 보내지 못하였으니 유감이나 운명이니 할 수 없구나. 너의 모친을 착실히 봉양하고 처자를 힘써 거느려 재물을 없애기는 털태우기 같이 쉽다는 교훈을 명심하여 근검 주성하면 죽어도 장차 눈을 감겠다.」하고 문득 十五일에 향년 六十세로 별세하니 슬픈 한을 어찌 다 하겠는가. 원근이 후덕한 사람이 갔다고 통석하였으며 상여줄을 잡고 제문을 지어 전을 올린 자가 매우 많았다. 묘소는 주암면 북바위골 봉사골 산소 백호등 아래 기슭 축좌원에 있고, 부인은 경주 정기성(鄭基聖)의 딸 노송정(老松亭) 지년(知年)의 후로 정미년(丁未年) 七월 三十日에 출생 하였다. 유한 정숙하여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군자를 공경하며 어른을 존대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부덕이 손색이 없었다. 계자는 휴철(休徹)이요, 딸은 청송 심인구(沈仁求) 강릉 유영철(劉英哲) 초계 최육모(崔六模)의 처며, 손자는 성용(成容), 자용(慈容)이고, 나머지는 어리었다. 아! 부군은 진실 돈후한 군자이다. 온화하고 어질며 사랑한 것은 바탕이 아름다움이요, 근검하고 맑고 삼가한 것은 집을 바르게 한 근본이며, 예에 따르고 정성을 다하여 관혼상제를 행한 것은 근원을 바르게 하고 근본을 이룬 것이요,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고 독실하게 자손을 가르친 것은 수신의 요결이요, 재각을 짓고 비를 세우며 보첩을 닦고 제전을 둔 것은 멀리 추모한 정성이며, 천륜을 두텁게 펴고 향속을 크게 교화하며 수원을 만들어 풍년을 노래하고 집집이 송덕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 아! 슬프다. 이같은 덕행으로서 현달하지 못하고 한낫 포의로 마치었으니, 이 또한 운명 일런지 하늘이 망극하다.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한 죄를 혹시 면할까 하여 감히 뜰을 지나며 보고 들은 것을 만에 하나라도 기술하니 엎드려 생각하건데 붓을 잡은 군자는 믿고 발휘하여 주기를 피눈물을 흘리며 빕니다. 아들 休徹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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